





그가 내게 이별을 말하기 전에
나는 이별에 대한 준비를 끝내야만 했다.
어렵사리 고른 노트는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웠다.
그 노트를 책상 위에 펴고,
정교하게 선이 그어진 하얀 첫 페이지를 빤히 바라봤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우리의 첫 키스?
첫 여행, 첫 경험, 첫 크리스마스…….
모든 것이 희미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우리의 마지막 키스, 마지막 여행, 마지막 섹스도
생생하게 기억하기 힘들 판인데.
우리가 알고 지낸, 그리고 사랑했던 시간은 자그마치 9년이다.
‘나’를 감싸는 우주가 온통 ‘너’일 뿐이었던 그때를…
그를 처음 만났던, 강렬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이별 노트를 사던 패기 넘치던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노트를 쓰는 동안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울고 있다.
이 노트에 한 글자라도 쓰는 순간
나는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
별안간 두려워졌다.
그에게 내가 ‘여자’가 아닌 하나의 ‘일부분’이 되어간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