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상상들
그를 만난 건 팔월이다. 서른 살인 ‘나’와 마흔 살인 ‘그’. 나에게 사랑은 소유지만, 그에게 여자들은 유희다. 나는 그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오직 그에게만 집중하지만 그는 한곳에 매여 있지 않다. 그의 일부는 나와 사랑을 했고, 다른 일부는 다른 여자들과 어울렸다.
나는 늘 그의 전부를 요구하지만 그는 전부란 없으며, 자신의 일부가 있을 뿐이다. 나는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강요할수록 그는 점점 지쳐간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자기를 사랑하기 원하고 내가 그 경계를 넘어서면 힘들어한다. 그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소리친다. 그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계속 한눈을 팔고 나는 그가 예전 같지 않다며 불평한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나를 떠난다.
2 사건들
그를 처음 만난 건 시월이다. 나는 젊은 화가들의 그룹전에 출품한 <청향>을 알아봐준 그에게 야릇한 흥분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를 다시 만나면 반드시 연애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K 선배는 그가 ‘애송이 킬러’라며 조심하라고 귀뜸한다. 그는 유머가 풍부했고, 신사다웠다. 그는 내 그림을 완전히 꿰뚫었고 나를 텅 비게 만들었다. 언제나 남산이 보이는 호텔에서 그와 초콜릿으로 범벅된 섹스를 즐겼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푹 빠져 있는 순간에도 다른 여자를 욕망했다. 그는 내가 옆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 그는 나를 만나지 않는 날엔 다른 여자를 만나지만 여전히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를 떠난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사랑받았던 시간만을 기억한다.
3 행위들
나는 나를 만난다. 나는 그의 새 애인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가 떠난 상태다. 나는 외부의 나(나)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나와 나는 그를 위해 뭔가를 하기로 한다. 나와 나는 지금까지 지나쳐온 모든 여자의 총화로 새로 태어나 ‘나나’가 된다. 나나는 나(나)였던 모든 여자들이 맛보았을 치명적인 독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다. 나나는 그가 참석한 행사장으로 찾아간다. ‘나나’가 됨으로써 여자로서의 모든 매력을 지닌 나나 앞에 그가 접근하고, 전과 같은 방식으로 나나를 유혹한다. 서울이 내다보이는 호텔에서 정사를 나누며 나나는 나(나)들이 내뱉었던 음탕한 말들을 반복하고, 그는 멈칫 놀라며 지금껏 자신을 지나왔던 여자들이 여러 차례 반복을 거듭한 ‘나나’였음을 깨닫는다. 그는 어느 여자를 만나도 언제나 ‘나나’에게로만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나는 최고의 오르가슴을 맛본다. 그리고 ‘그’라는 이름이 없는 그의 사랑을 기다린다.